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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엄복동 "중고자전거으로 자전거 대장" 엄복동 자전거 문화재


안녕하세요. 핫클릭이슈매거진입니다. 자전거 좋아하시나요? 최근 세계적으로 환경을 생각하자는 일환으로 자전거타기 운동이 일고 있습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이동수단이 되었죠. 오늘 서프라이즈 엄복동 편에서는 동양의 자전거 대장이란 별명이 있는 엄복동 에 대해서 다뤘습니다.파란만장했던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시죠.



20세기 초반만해도 대한민국의 이동수단은 자전거 였습니다. 과거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만 봐도 알 수 있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즐겨 탔고 심지어 여러 대회까지 열리게 됩니다. 이런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분이 엄복동 씨입니다. 자전거가 좋아 직장도 자전거업체에서 근무하게 된 엄복동은 우연히 출전한 첫 대회에서 바로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 각종 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게 되죠. 여기서 엄봉동에게 동양의 자전거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당시 대회에서 한국사람이 우승하는 것은 식민지 시대의 국민들에게 많은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 처럼 말이죠. 최신식 자전거 자랑하던 일본 선수와는 달리 염복동의 자전거는 중고 였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번번히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식민지로 지배당하고 있던 시절에 스포츠 영웅의 탄생은 서러움과 좌절을 겪고 있는 시민들에게는 많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과거 대부분의 남성들과는 달리 엄복동은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키가 165cm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심폐기능과 지지말라는 국민들의 응원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집념이 그를 더욱더 강하게 해주었습니다.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죠. 한 대회에서는 40바퀴를 도는 경기에서 30바퀴째까지는 꼴지였으나  결국 우승을 거뭐지게 됩니다. 이 경기는 자전거 경기 역사장 전설로 남는 경기라고 합니다.



엄봉동의 또 한 가지 일화는 자전거 대회에서 엄복동이 우승하려고 하자 일본 출신 심판들이 날이 저물었다며 경기를 중단시키는 등 비상식적인 판정을 내렸는데 이에 격분한 엄복동은 본부석으로 뛰어들어 우승기를 잡고 꺾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일본과 한국관객사이에서 큰 싸움이 일어났었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사람에게 엄복동은 영웅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좌절과 희망을 잃었던 한국의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엄복동, 그의 자건거는 2010년도에 결국 문화재가 됩니다. 당연하 결과 겠지요. 하지만 엄복동의 말년을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많은 대회에서 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복동은 집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떠돌아 다녔는데 1951년 동두천의 한 야산에서 폭격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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